맨위로가기

로베르트 엥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베르트 엥케는 1977년 동독 예나에서 태어난 독일의 축구 선수로, 골키퍼로 활약했다. 1995년 FC 카를 차이스 예나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SL 벤피카, FC 바르셀로나 등 여러 클럽을 거쳐 하노버 96에서 주전 골키퍼로 자리 잡았다. 1999년 독일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UEFA 유로 2008에 참가했으며, 2009년 11월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A매치 8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2009년 11월 10일, 하노버 인근 철도 건널목에서 열차에 치여 사망했으며, 우울증을 겪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자살한 축구 선수 - 게리 스피드
    게리 스피드는 웨일스 출신의 다재다능한 미드필더 출신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여러 프리미어리그 클럽에서 활약했으며 웨일스 국가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했고, 웨일스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나 2011년 사망했다.
  • 자살한 축구 선수 - 정종관
    정종관은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FA컵과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기여한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였으나, 병역 기피와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
  • 2009년 자살 - 카토 카즈히코
    가토 카즈히코는 포크 크루세이더스와 사디스틱 미카 밴드 활동, 다양한 아티스트 프로듀싱, 영화 음악 제작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일본의 영향력 있는 뮤지션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이다.
  • 2009년 자살 - 정남규 (범죄인)
    정남규는 1969년 전라북도 장수군 출생으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연쇄살인 범죄를 저질렀으며, 2007년 사형이 확정되어 수감 중 2009년 자살로 사망했다.
  • FC 카를 차이스 예나의 축구 선수 - 마리안 자어
    마리안 자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FC 카를 차이스 예나 등 여러 클럽에서 활약했으며 독일 U-17 국가대표팀 선수로도 활동한 독일의 축구 선수이다.
  • FC 카를 차이스 예나의 축구 선수 - 비탈리 룩스
    비탈리 룩스는 키르기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이자 독일 하부 리그에서 활동한 축구 선수로, SpVgg 운터하힝에서 프로 데뷔 후 키르기스스탄 국가대표로서 2018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과 2019 AFC 아시안컵에서 활약하며 팀의 아시안컵 16강 진출에 기여했다.
로베르트 엥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08년 하노버 96에서 훈련 중인 엔케
2008년 하노버 96에서 훈련 중인 엔케
본명로베르트 엔케
출생일1977년 8월 24일
출생지동독 예나
사망일2009년 11월 10일 (향년 32세)
사망 장소독일 노이슈타트암뤼벤베르게
1.86m
포지션골키퍼
클럽 경력
유소년 클럽1985: BSG 예나팜
1986–1995: 카를 차이스 예나
프로 클럽1995–1996: 카를 차이스 예나 (3경기, 0골)
1996–1999: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32경기, 0골)
1999–2002: 벤피카 (77경기, 0골)
2002–2004: 바르셀로나 (1경기, 0골)
2003: → 페네르바흐체 (임대) (1경기, 0골)
2004: → 테네리페 (임대) (9경기, 0골)
2004–2009: 하노버 96 (164경기, 0골)
총 출장 및 득점287경기, 0골
국가대표 경력
청소년 국가대표1997–1999: 독일 U-21 (15경기, 0골)
1998: 독일 올림픽 (4경기, 0골)
2000–2004: 독일 B (2경기, 0골)
성인 국가대표2007–2009: 독일 (8경기, 0골)

2. 생애

1977년 동독 예나에서 스포츠 심리학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95년 고향팀 FC 카를 차이스 예나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1996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하여 활약하면서 1999년 처음으로 독일 대표팀에 발탁되어 199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참가했다.

이후 1999년 포르투갈SL 벤피카로 이적하여 좋은 활약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2002년 스페인의 명문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많은 기회를 얻지 못했고, 터키의 페네르바흐체 SK와 스페인 2부 리그의 CD 테네리페에서 임대 생활을 했다.

2004년 독일하노버 96으로 이적하면서 선수 경력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2006년 국가대표팀에 복귀했고, UEFA 유로 2008에 독일 대표팀의 두 번째 골키퍼로 참가했다. 옌스 레만의 은퇴 이후 차기 주전 골키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2009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2. 1. 유소년 시절

1977년 동독 예나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시작하여 처음에는 스트라이커로 뛰었지만, 이후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이 포지션에서 뚜렷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985년 SV Jenapharm 유소년 팀 소속으로 FC 카를 차이스 예나를 상대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후, 카를 차이스 예나 유소년 팀에 합류했다.[9]

카를 차이스 예나 유소년팀을 거쳐 1993년 독일 U-15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잉글랜드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치렀다. 경기는 0-0 무승부로 끝났으며, 엥케는 경기 내내 여러 차례 선방을 보여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7] 17세에 카를 차이스 예나와 첫 프로 계약을 맺었으며,[9] 1995년 FC 카를 차이스 예나 1군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 2. 클럽 경력

1977년 동독 예나에서 태어나 1995년 FC 카를 차이스 예나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96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하여 분데스리가 무대를 경험했고, 이곳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1999년 독일 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어 199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참가했다.

이후 1999년 포르투갈SL 벤피카로 이적하여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2002년에는 스페인의 명문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많은 기회를 얻지 못했고, 터키의 페네르바흐체스페인 2부 리그의 CD 테네리페에서 임대 선수로 뛰었다.

2004년 하노버 96으로 이적하며 분데스리가로 복귀했고, 이곳에서 주전 골키퍼이자 주장으로 활약하며 선수 경력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노버에서의 꾸준한 활약으로 2006년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여 UEFA 유로 2008에 참가했으며, 옌스 레만의 은퇴 이후 독일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자리를 이을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다. 2009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 2. 1. 초기 경력

1977년 동독 예나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모 댁 정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고향팀인 FC 카를 차이스 예나 유소년팀을 거쳐 1995년 1군으로 승격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8] 1995년 11월 11일, 훗날 몸담게 될 하노버 96을 상대로 2.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FC 카를 차이스 예나의 주전 골키퍼였던 마리오 노이만이 MSV 뒤스부르크VfL 보훔에게 연달아 대량 실점(3경기 14실점)하며 부진하자, 에버하르트 포겔 감독은 젊은 엥케에게 기회를 주었다. 엥케는 1995년 11월 동안 3경기에 출전했지만, 이후 노이만이 다시 주전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 시즌에는 더 이상 1군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1996년 여름, 엥케는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했다. 이적 후 첫 두 시즌 동안은 주로 클럽의 U-23팀 소속으로 하위 리그에서 뛰었으며, 21세 이하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활동하며[9] 경험을 쌓고 기량을 연마했다. 동시에 당시 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우베 캄프스의 플레이를 보며 배웠다.[9]

1998-99 시즌 개막 직전, 주전 골키퍼 우베 캄프스가 아킬레스건 파열 부상을 당하면서 엥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새로 부임한 프리델 라우쉬 감독은 엥케를 주전으로 기용하기로 결정했다.[9] 1998년 8월 15일, 샬케 04와의 경기에서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고, 팀의 3-0 무실점 승리를 이끌며 성공적인 데뷔를 알렸다. 이 승리로 묀헨글라트바흐는 잠시 리그 선두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팀은 이후 급격히 부진에 빠졌고(한때 일주일 만에 15골을 실점하기도 했다[9]),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여 결국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되었다(라이너 본호프가 11월부터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어려운 팀 상황 속에서도 엥케의 활약은 인정받아 1999년 독일 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되었고, 멕시코에서 열린 199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참가했다.

2. 2. 2. 해외 생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가 2부 리그로 강등된 후, 엥케는 1999년 6월 포르투갈SL 벤피카로 이적하여 3년 계약을 맺었다.[10] 당시 벤피카는 엥케의 동포인 유프 하인케스가 감독을 맡고 있었고, 하인케스는 엥케를 즉시 주장으로 임명했다. 엥케는 이전에 공황 발작을 겪은 적이 있었고,[9] 벤피카와 계약한 직후 이적을 망설였으나, 계약을 이행하기로 결정했다.[9] 포르투갈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엥케가 벤피카에서 보낸 3시즌 동안 감독이 세 번이나 바뀌었고, 팀은 우승 없이 리그 역대 최저 순위인 6위를 기록했으며, 재정난으로 선수들의 임금 지급이 자주 지연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엥케는 꾸준한 활약으로 벤피카 팬들의 존경을 받았고, 아스널,[11]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은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았다.[13] 벤피카와의 계약 연장 협상이 결렬되자, 엥케는 2002년 6월 스페인FC 바르셀로나로 자유 이적하여 3년 계약을 맺었다.[14]

캄 노우에서의 생활은 엥케에게 힘든 시기였다. 그는 나중에 바르셀로나의 골키퍼 자리를 "유럽에서 가장 어려운 골키퍼 포지션"이라고 회상했다.[15] 그는 로베르토 보나노빅토르 발데스에 이어 세 번째 골키퍼였고, 출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그의 바르셀로나 데뷔전은 2002년 9월 11일 코파 델 레이 3라운드 노벨다 CF(3부 리그 팀)와의 경기였는데, 팀이 예상치 못하게 패배하면서 동료 프랑크 데 부어에게 공개적으로 비난받았다.[16] 그의 라리가 출전은 2003년 3월 2일 CA 오사수나와의 경기에서 후반 20분 교체 출전한 것이 전부였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 리그에서 클럽 브뤼헤와 갈라타사라이를 상대로 두 경기에 출전했다.

2003년 여름, 루이스 판 할 감독이 떠나고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이 부임하면서 엥케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그는 뤼슈튀 레치베르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는 조건의 일부로, 크리스토프 다움 감독이 이끄는 터키의 페네르바흐체로 임대되었다. 하지만 터키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2003년 8월 10일 이스탄불스포르와의 단 한 경기에 출전했는데, 팀이 0-3으로 대패하자 팬들은 경기 중 라이터와 병 등을 던지며 그에게 패배의 책임을 돌렸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엥케는 즉시 임대 계약을 파기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17] 이 시기에 엥케는 처음으로 우울증을 겪었으며, 축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바르셀로나로 복귀했지만 4개월 동안 1군 스쿼드에서 제외된 엥케는 2004년 1월, 시즌 종료까지 스페인 세군다 디비시온(2부 리그)의 CD 테네리페로 다시 임대되었다.[18] 테네리페에서 그는 안정적인 활약을 펼치며 팬들과 다른 클럽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비록 하위 리그였지만, 테네리페에서의 경험은 엥케가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2. 2. 3. 분데스리가 복귀

스페인 2부 리그 CD 테네리페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엥케는 2004년 7월, 분데스리가하노버 96으로 이적료 없이 합류하며 독일 무대로 복귀했다. 초기 계약 기간은 2년이었다. 하노버 96에서 그는 주전 골키퍼 자리를 확고히 다졌고, 선수 경력 중 가장 큰 성공과 안정을 누렸다. 그의 뛰어난 실력은 동료 선수들에게도 인정받아 키커지 선정 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뽑혔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엥케는 2006년 독일 대표팀에 다시 발탁되었고, UEFA 유로 2008에서는 옌스 레만에 이어 두 번째 골키퍼로 참가했다. 레만의 대표팀 은퇴 이후에는 사실상 독일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자리를 예약한 상태였다. VfB 슈투트가르트 등 더 큰 클럽으로의 이적설도 제기되었으나, 2006년 12월 하노버 96과 2009-10 시즌 종료까지 계약을 연장하며 팀에 대한 의리를 보였다. 2007-08 시즌부터는 팀 동료들의 신임을 얻어 주장으로 선출되었고, 선수 생활 마지막까지 주장을 맡았다. 2008-09 시즌에도 다시 한번 최고의 골키퍼 상(키커지 선정 베스트 일레븐)을 수상하며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시즌이 그의 마지막 풀 시즌이 되었다.[19]

엥케는 하노버 96 소속으로 총 180경기에 출전했다. 그의 마지막 공식 경기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기 이틀 전인 2009년 11월 8일, 함부르크 SV와의 홈 경기로,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다.[20]

2. 3. 국가대표 경력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뛰던 1997년 처음으로 독일 U-21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고, 시즌 종료까지 등번호 1번을 유지하며 총 15경기에 출전했다. 이러한 활약은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에리히 리벡에게 인상을 주어 199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대회에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터키 등 해외 리그에서 활동하면서 한동안 국가대표팀과 거리가 멀어졌다. 2004년 분데스리가하노버 96으로 이적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시절 2006년 FIFA 월드컵 최종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후임 요아힘 뢰프 감독 체제에서 조지아와의 친선 경기를 통해 대표팀에 복귀했다. 주전 골키퍼였던 옌스 레만이 독감으로 결장했을 때 키프로스와의 경기에도 출전 기회를 얻었다.

엥케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A매치 데뷔는 2007년 3월 28일 뒤스부르크에서 열린 덴마크와의 친선 경기였으며, 이 경기에서 독일은 0-1로 패배했다.[21] 이후 꾸준히 대표팀에 발탁되어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 공동 개최된 UEFA 유로 2008 최종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는 옌스 레만의 백업 역할을 맡아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고, 독일은 준우승을 차지했다.

유로 2008 이후 레만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면서 엥케에게 주전 골키퍼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예선 여러 경기에 선발 출전하며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2008년 10월, 러시아와의 예선 경기를 앞두고 대표팀 훈련 중 왼손 주상골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다. 수술 후 약 2개월간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그 사이 레네 아들러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2009년 1월 부상에서 복귀한 엥케는 다시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자리를 되찾았다.[22]

그러나 2009년 9월과 10월, 엥케는 다시 몇 주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 하노버 96 구단은 그 원인을 장 감염균인 캄필로박터 감염이라고 발표했지만, 이후 출간된 론 알렌스의 저서 "A Life Too Short: The Tragic Story of Robert Enke"를 통해 이것이 부분적인 사실이며, 실제로는 엥케의 우울증이 재발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10월 말에야 다시 경기에 복귀했고, 이로 인해 칠레와의 친선 경기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경기는 엥케가 사망한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결국 취소되었다.[23] 엥케는 사망 직전까지 마누엘 노이어 등을 제치고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독일의 주전 골키퍼가 될 것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었다.[24]

엥케는 총 8번의 A매치에 출전했다.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는 2009년 8월 12일에 열린 아제르바이잔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였으며, 이 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25]

3. 개인사

엥케는 1977년 8월 24일 예나에서 태어나 로베다 구역의 아파트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포츠 심리학자인 디르크 엥케, 어머니는 기젤라 엥케이며, 세 자녀 중 막내였다.

학생 시절 만난 급우였던 테레사 롸임과 교제하여 프로 입단 후 동거를 거쳐 결혼했다. 테레사는 전 근대5종 선수였다.[26] 두 사람 사이에는 딸 라라가 태어났으나, 선천적인 심장 기형(좌심형성부전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라라는 심장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된 약물 부작용으로 청각 장애까지 겪게 되었다.[27] 인공 와우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28][29][30] 안타깝게도 라라는 2006년 9월 17일, 2세의 나이로 심장 기형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후 2009년 5월, 엥케 부부는 여자아이 레일라를 입양했다.[31] 엥케는 2009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노이슈타트암뤼벤베르게 근처 엠페데의 작은 농장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엥케와 그의 아내는 여러 동물 권리 운동에 참여했으며, 많은 애완동물을 키웠다.[32] 특히 모피 매매에 반대하는 PETA 캠페인에도 참여했다. 그는 차분한 생활을 선호하여 개와 산책하거나 자택의 소파, 혹은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2009년 11월 10일, 엥케는 하노버 인근 철도 건널목에서 열차에 치여 향년 32세로 숨졌다. 철로 근처에서 그의 차가 발견되는 등 정황상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59] 독일 언론들은 엥케가 딸 라라를 병으로 잃은 후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고, 이후 대표팀 탈락 등으로 컨디션 난조를 겪으며 우울증이 심화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도했다.

4. 사망

2009년 11월 10일, 엥케는 하노버 인근 노이슈타트암뤼벤베르게의 건널목에서 지역 급행 열차에 뛰어들어 향년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34][59] 경찰은 정황상 자살로 결론 내렸으며, 현장에서 유서가 발견되었으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35][59]

그의 아내 테레사는 엥케가 사망 전 6년간 주요 우울 장애로 고통받으며 정신과 치료를 받아왔다고 밝혔다.[36][56] 특히 2006년 선천성 심장 질환(좌심형성부전 증후군)으로 두 살 된 딸 라라를 잃은 후 큰 상실감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28][29][30][39] 독일 언론은 딸의 죽음과 컨디션 난조로 인한 대표팀 탈락 등이 우울증을 심화시켜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한 것으로 분석했다.

4. 1. 사망 이후

2009년 11월 10일, 엥케는 하노버 인근 노이슈타트암뤼벤베르게의 건널목에서 급행 열차에 치여 향년 32세로 사망했다.[33][34][59] 경찰은 현장에서 유서를 발견했으나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고,[35] 정황상 자살로 결론 내렸다.[59] 그의 아내 테레사는 엥케가 6년 동안 주요 우울 장애로 고통받으며 정신과 치료를 받아왔다고 밝혔다.[36][56] 특히 2006년 친딸 라라가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그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39] 컨디션 난조로 인한 대표팀 탈락 등도 우울증을 심화시킨 요인으로 독일 언론은 분석했다.

하노버 HDI-아레나에 놓인 추모물


엥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팬들이 하노버 96의 홈구장인 HDI-아레나로 모여들어 꽃을 놓고 촛불을 밝히며 그를 추모했다. 그의 전 소속팀 FC 바르셀로나는 당일 경기 시작 전 1분간 묵념의 시간을 가졌고, 다음 주말에 열린 여러 국제 경기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11월 14일로 예정되었던 칠레와의 친선 경기를 취소했으며,[37][57] 훈련과 인터뷰 등 모든 일정을 중단했다. 국가대표팀 단장 올리버 비어호프는 "우리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라고 심경을 밝혔다.[39] 2009년 11월 21일과 22일에는 모든 분데스리가 경기와 타사 드 포르투갈에서 열린 벤피카의 경기에서도 1분간의 묵념이 진행되었다.[38]

2009년 11월 15일, HDI-아레나에서 열린 엥케의 추모식에는 약 4만 명의 추모객이 참석했다.[40] 흰 장미로 덮인 그의 관은 하노버 96 동료 6명에 의해 운구되었으며,[40] 하노버 외곽 노이슈타트에 있는 딸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41] 하노버 96 선수들은 고인을 기리기 위해 독일 축구 리그의 승인을 받아 2009-10 분데스리가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유니폼 가슴에 숫자 1을 원 안에 새기고 경기에 나섰다.[42] 2019년에는 사망 10주기를 맞아 하노버의 한 극장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43]

엥케의 사망 이후 몇 달간 철도 자살 건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44] 이는 독일뿐 아니라 인근 국가에서도 관찰되었다.[45] 이 현상은 유명인의 자살이 모방 자살로 이어지는 베르테르 효과와 유사하며, 독일 언론에서는 이를 '''엥케 효과''' (Enke-Effektde)라고 불렀다. 연구자들은 언론 보도 방식, 즉 자살 방법과 장소의 구체적인 묘사, 슬퍼하는 팬들의 모습, 개인적인 고뇌에 대한 추측 등이 모방 심리를 자극한 요인이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44][46][47]

로날트 렝이 쓴 엥케의 전기 《너무 짧은 인생: 로베르트 엥케의 비극》(A Life Too Short: The Tragedy of Robert Enke)은 2011년 윌리엄 힐 스포츠 도서상을 수상했다.[48][49] 또한 독일 축구 협회, 하노버 96, 독일 축구 리그는 엥케를 기리는 로베르트 엥케 재단을 설립하여 선수들의 정신 건강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엥케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소속팀과 대표팀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노버 96에서는 플로리안 프롬롤로비츠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2010년 1월 부임한 미르코 슬롬카 감독이 새로운 골키퍼 영입을 추진하면서 선수단 내 갈등이 발생했고, 팀은 시즌 막판까지 강등권 경쟁을 벌였다.[58]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2010 FIFA 월드컵 주전 골키퍼로 유력했던 레네 아들러(바이어 04 레버쿠젠)가 대회 직전 부상으로 낙마하면서, 샬케 04 소속의 젊은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가 주전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5. 영향



2009년 11월 10일 밤, 32세의 엥케는 노이슈타트 암 뤼벤베르거의 한 건널목에서 지역 급행 열차에 뛰어들어 철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33][34] 경찰은 유서를 발견했지만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35] 그의 미망인 테레사는 엥케가 6년 동안 주요 우울 장애를 앓으며 정신과 치료를 받아왔다고 밝혔다.[36] 특히 2006년 딸 라라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큰 상실감에 힘들어했다.[39]

엥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팬들이 즉시 하노버 96의 홈구장인 AWD-아레나로 모여들어 꽃을 놓고 촛불을 켜며 조의를 표했다. 그의 전 소속팀 바르셀로나는 그날 밤 경기 시작 전 1분간 묵념을 했고, 다음 주말에 열린 여러 국제 경기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추모가 이루어졌다. 독일 국가대표팀은 존경의 표시로 11월 14일로 예정되었던 칠레와의 친선 경기를 취소했다.[37] 2009년 11월 21일부터 22일까지 모든 분데스리가 경기와 타사 드 포르투갈에서 열린 벤피카의 경기에서도 1분간의 묵념이 진행되었다.[38] 독일 대표팀은 예정된 훈련과 모든 인터뷰를 취소했으며, 당시 단장이었던 올리버 비어호프는 "우리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했다.[39]

2009년 11월 15일, 약 4만 명의 추모객이 AWD-아레나에서 열린 엥케의 추모식에 참석했다. 흰 장미로 덮인 그의 관은 하노버 96 동료 6명에 의해 운구되었다.[40] 그는 하노버 외곽 노이슈타트에 있는 딸의 묘지 옆에 안장되었다.[41] 하노버 96 선수들은 DFL의 승인을 받아 2009-10 분데스리가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유니폼 가슴에 원 안에 숫자 1을 새겨 그를 기렸다.[42]

2019년에는 그의 10주기를 맞아 하노버의 한 극장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43]

엥케의 사망 이후 몇 달 동안 철도 자살 건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44] 이후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독일뿐 아니라 인근 국가에서도 나타났다.[45] 이는 유명인의 자살이 모방 자살로 이어지는 베르테르 효과의 일종으로, 독일 언론에서는 이를 '''엥케 효과'''(Enke-Effektde)라고 불렀다. 연구자들은 엥케의 자살에 대한 언론 보도가 다른 사람들의 자살 실행을 부추길 수 있는 여러 요인을 포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예를 들어, 자살 방법과 장소에 대한 상세한 묘사, 슬픔에 잠긴 팬들이 경기장에 남긴 추모 물품 이미지, 그리고 딸의 죽음이나 축구 선수로서 겪었던 좌절이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에 대한 추측성 보도 등이 지적되었다.[44][46][47]

6. 기록

(내용 없음)

6. 1. 클럽

예나에서 태어나 조부모 댁 정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고향팀인 FC 카를 자이스 예나에 입단하여 1995년 11월 11일 하노버 96전에서 2.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주전 골키퍼였던 마리오 노이만이 3경기에서 14실점을 하자 에벨하르트 포겔 감독은 엥케에게 출전 기회를 주었고, 11월 중에 3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노이만이 주전 골키퍼로 복귀하면서 엥케는 더 이상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52]

1996년 여름, 분데스리가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하여 처음 2시즌은 하부 리그에 속하는 U-23 팀에서 뛰었다. 1998-99 시즌 개막 전에 주전 골키퍼 우베 캄프스가 부상을 당하자 프리델 라우쉬 신임 감독은 엥케에게 데뷔 기회를 주었다. 1998년 8월 15일 샬케 04와의 경기에서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러 3-0 무실점 승리를 이끌었지만, 이후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52]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가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되자, 엥케는 독일인 위프 하인케스가 감독을 맡고 있던 포르투갈벤피카로 이적했다. 당시 벤피카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고, 엥케가 머물렀던 3시즌 동안 감독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클럽은 재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 선수들의 급여 지급이 지연되기도 했다. 팀 성적도 좋지 않아 리그에서 역대 최저인 6위를 기록했고, 우승 트로피를 하나도 얻지 못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엥케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아스널 FC,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등 여러 빅클럽의 관심을 받았다.[52]

2002년 6월, 벤피카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이적료 없이 3년 계약으로 스페인의 명문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골키퍼 자리를 "유럽에서 가장 어려운 골키퍼 포지션"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주로 로베르토 보나노의 후보 골키퍼로 머물렀다. 2002년 9월 11일, 코파 델 레이 3라운드 노벨다 CF전에서 데뷔했지만, 팀이 하위 리그 팀에게 패배하면서 동료 프랑크 데 부어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라리가 데뷔는 2003년 3월 2일 CA 오사수나전에서 마지막 20분 동안 교체 출전하며 이루어졌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클럽 브뤼헤전과 갈라타사라이전에 출전했다.[52]

2003년 여름, 루이스 판 할 감독이 떠나고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이 부임하면서 엥케는 튀르키예페네르바흐체로 임대 이적했다. 당시 페네르바흐체는 독일인 크리스토프 다움이 감독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2003년 8월 10일 이스탄불스포르와의 쉬페르리그 데뷔전이자 유일한 출전 경기에서 팀이 0-3으로 대패하자, 팬들은 경기 중 라이터, 빈 병, 돌 등을 던지며 패배의 책임을 엥케에게 돌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엥케는 예정보다 일찍 스페인으로 돌아와야 했다. 2003-04 시즌 겨울, 바르셀로나로 복귀한 그는 2004년 1월 세군다 디비시온CD 테네리페로 다시 임대되었다. 테네리페에서는 안정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팬들과 다른 클럽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52]

2004년 7월, 엥케는 분데스리가하노버 96으로 이적료 없이 2년 계약을 맺고 이적했다. 하노버에서 그는 주전 골키퍼로 확고히 자리 잡으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고, 독일의 축구 전문지 키커로부터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했다. VfB 슈투트가르트 등 더 큰 클럽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2006년 12월 하노버와의 계약을 2009-10 시즌 종료까지 연장하며 팀에 남았다. 2007-08 시즌에는 동료들의 투표로 팀 주장에 선출되었고, 2시즌 넘게 주장직을 수행했다. 2008-09 시즌에는 소속팀 하노버 96이 리그 11위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키커지의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하노버 96 소속으로 통산 180경기에 출전했으며, 그의 마지막 경기는 2009년 11월 8일 함부르크 SV전(1-1 무승부)이었다. 이틀 뒤인 11월 10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52]

클럽, 시즌 및 대회별 출장 및 골 기록[52]
클럽시즌리그대륙 대회합계
리그출장출장출장출장
FC 카를 자이스 예나1995–962. 분데스리가300030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1996–97분데스리가00000000
1997–98분데스리가000000
1998–99분데스리가32040360
합계3204000360
벤피카1999–2000프리메이라리가2601060330
2000–01프리메이라리가2604020320
2001–02프리메이라리가25030280
합계7708080930
FC 바르셀로나2002–03라리가10102040
페네르바흐체 (임대)2003–04쉬페르리그100010
CD 테네리페 (임대)2003–04세군다 디비시온9090
하노버 962004–05분데스리가34040380
2005–06분데스리가32030350
2006–07분데스리가34040380
2007–08분데스리가34020360
2008–09분데스리가24020260
2009–10분데스리가601070
합계16401601800
선수 경력 합계28702901003260

6. 2. 국가대표팀

엥케의 등번호 1번 유니폼은 2013년 니더작센슈타디온에서 열린 다른 독일 스포츠 선수들의 유니폼과 함께 전시되었다.


엥케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뛰던 1997년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독일 U-21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고, 등번호 1번을 달고 총 15경기에 출전했다. 그의 활약은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에리히 리벡에게 인상을 주어 199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실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독일 무대를 떠나 해외 리그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국가대표 경력은 잠시 주춤했고, 분데스리가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하노버 96 이적 후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2006년 FIFA 월드컵 대표팀 발탁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당시 감독이었던 위르겐 클린스만 체제 하에서는 최종 명단에 들지 못했다.

이후 새로 부임한 요아힘 뢰프 감독 아래에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했다. 조지아와의 친선 경기에 소집되었고, 주전 골키퍼 옌스 레만이 독감으로 결장하자 키프로스와의 경기에도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3월 28일, 뒤스부르크에서 열린 덴마크와의 친선 경기에서 독일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으나 팀은 0-1로 패배했다.[21] 이후 꾸준히 대표팀에 발탁되어 오스트리아스위스에서 공동 개최된 UEFA 유로 2008 최종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독일은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엥케는 대회 기간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유로 2008 이후 주전 골키퍼였던 옌스 레만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면서 엥케에게 주전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2010년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여러 차례 선발 출전하며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2008년 10월, 러시아와의 예선 경기를 앞두고 대표팀 훈련 도중 왼손 주상골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다. 수술 후 약 2개월간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그 기간 동안 레네 아들러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2009년 1월 부상에서 복귀한 후, 다시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자리를 되찾았다.[22]

2009년 9월과 10월, 엥케는 다시 몇 주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 하노버 96 구단 측에서는 장 감염균인 캄필로박터 감염을 공식적인 결장 사유로 밝혔으나, 이후 출간된 론 알렌스의 저서 "A Life Too Short: The Tragic Story of Robert Enke"를 통해 이것이 부분적인 사실이며 실제로는 엥케의 우울증이 재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10월 말에야 다시 경기에 복귀했지만, 이로 인해 그가 사망했을 당시 대표팀이 준비 중이던 칠레와의 친선 경기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경기는 엥케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추모하기 위해 결국 취소되었다.[23] 사망 직전까지도 엥케는 마누엘 노이어 등을 제치고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독일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할 것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었다.[24]

엥케는 총 8번의 A매치에 출전했다.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는 2009년 8월 12일에 열린 아제르바이잔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였으며, 이 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25]

'''국가대표팀 출전 기록'''[53]

국가대표팀연도출장
독일200710
200830
200940
합계80


7. 수상

'''페네르바흐체'''



'''독일'''

7. 1. 클럽

엥케는 1995-96 시즌에 카를 차이스 예나 1군으로 올라섰다.[8] 그는 1995년 11월 11일, 미래의 소속팀인 하노버 96를 상대로 2. 분데스리가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뒤스부르크보훔에게 2연속으로 참패를 당한 후, 당시 감독 에버하르트 포겔이 기존의 주전 골키퍼 마리오 노이만을 대신하여 젊은 엥케에게 기회를 주었다. 엥케는 1995년 11월 동안 3경기에 출전했지만, 이후 노이만이 팀에 복귀하면서 그 시즌에 1군 경기에 더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 골키퍼는 실제로 그 클럽에서 다시는 뛰지 못했는데, 1996년 여름에 분데스리가 클럽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엥케는 이곳에서 처음 두 시즌을 클럽의 U-23팀에서 보냈고, 하위 리그에서 뛰었으며, 21세 이하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하며[9] 재능을 연마하고, 클럽의 주전 골키퍼인 우베 캄프스를 연구했다.[9]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은 1998-99 시즌 직전, 우베 캄프스가 아킬레스건 파열 부상을 당했고, 새로운 감독 프리델 라우쉬가 엥케에게 마침내 클럽 데뷔를 할 수 있는 큰 기회를 주면서였다.[9] 그의 첫 번째 분데스리가 경기는 1998년 8월 15일, 샬케 04를 3-0으로 이긴 경기였으며, 이 승리로 팀은 리그 선두에 올랐다. 그러나 엥케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일주일 만에 15골을 실점하면서 이 순위는 빠르게 바뀌었다.[9] 클럽은 리그 최하위로 추락했고, 10월부터 강등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라이너 본호프는 11월부터 감독을 맡았다).

1999년 6월, 그는 포르투갈의 벤피카에 입단하여 3년 계약을 체결했고,[10] 팀 골키퍼 4명 중 한 명이 되었다. 엥케는 공황 발작의 병력이 있었고,[9] 팀과 계약한 직후 망설였다. 그러나 그는 계약을 체결했기에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9] 당시 클럽은 엥케의 동향인 유프 하인케스가 감독을 맡고 있었고, 그는 즉시 그를 주장으로 임명했다. 그의 포르투갈 생활은 격동의 시기였다. 그가 벤피카에서 3시즌을 보내는 동안 감독이 세 번이나 바뀌었고, 무관의 시절에 역대 최저 리그 순위(6위)를 기록했으며, 선수들의 임금 지급이 자주 지연되는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엥케는 벤피카 팬들의 존경을 빠르게 얻었으며, 그를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엥케의 활약은 'Encarnados'(레즈) 팬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를 쫓는 아스널,[11]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은 클럽들의 관심을 받았다.[13] 벤피카와의 계약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후, 엥케는 스페인 거대 클럽인 바르셀로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2년 6월 3년 계약으로 자유 이적했다.[14]

캄 노우에서의 생활은 엥케에게 힘든 시련이었다. 그는 나중에 바르사의 골키퍼 자리를 "유럽에서 가장 어려운 골키퍼 포지션"이라고 칭했다.[15] 그는 로베르토 보나노빅토르 발데스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선택으로 경기를 뛰게 되었다. 그의 데뷔는 2002년 9월 11일, 클럽이 코파 델 레이에서 3부 리그의 노벨다 CF에게 첫 번째 고비에서 굴욕적으로 탈락하면서 시작되었고, 동료 프랑크 데 부어는 그의 탈락에 대한 책임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16]

그의 짧은 라 리가 출전은 2003년 3월 2일 오사수나와의 2-2 무승부 경기에서 20분 동안 교체 출전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유럽 무대에서도 몇 차례 경험을 쌓았는데,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에서 클럽 브뤼헤와 갈라타사라이를 상대로 두 번 출전했다.

다음 시즌, 루이스 판 할 감독을 대신하여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엥케는 루슈튀 레치베르가 스페인 클럽으로 이적하는 조건으로 독일인 감독 크리스토프 다움이 당시 감독을 맡고 있던 터키 클럽 페네르바흐체로 임대되었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계속 정체되어, 그는 2003년 8월 10일 이스탄불스포르와의 0-3 참패 경기에서 단 한 경기만 출전했다. 그의 팬들은 이 쓰라린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경기 중에 그에게 라이터와 병을 던졌다. 이러한 장면들은 엥케가 즉시 클럽과 계획했던 1년 임대를 포기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17] 이때 엥케는 우울증을 처음 겪었고, 이로 인해 그는 거의 축구를 포기할 뻔했다.

바르셀로나에서 4개월 동안 1군 스쿼드에서 제외된 채 머물던 엥케는 2004년 1월 시즌 종료까지 CD 테네리페로 임대되면서 스페인 세군다 디비시온으로 강등되었다.[18] 여기서 그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팬들과 다른 클럽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경력이 하위 리그에 머물 운명이라고 믿었지만, 테네리페를 떠나 분데스리가의 하노버 96에 합류했다.

7. 2. 개인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골키퍼: 2006, 2009
  • VDV 분데스리가 시즌의 팀: 2008-09
  • NFV 올해의 축구 선수: 2007

참조

[1] 웹사이트 Robert Enke https://www.tff.org/[...] Turkish Football Federation 2019-10-03
[2] 웹사이트 Robert Enke http://www.hannover9[...] 2009-04-17
[3] 웹사이트 Nationaltorwart Robert Enke ist tot http://www.stern.de/[...] stern.de 2009-11-11
[4] 웹사이트 Ein außergewöhnlicher Torwart http://www.n24.de/ne[...] N24.de 2009-11-11
[5] 웹사이트 Germany Goalkeeper Robert Enke Dies Aged 32 http://www.goal.com/[...] Goal.com 2009-11-11
[6] 뉴스 German soccer star Enke killed by train http://www.edition.c[...] CNN 2009-11-11
[7] 뉴스 Soccer: England denied by Germans Telegraph Media Group 1993-06-14
[8] 웹사이트 Der FC Carl Zeiss Jena trauert um Robert Enke http://www.fc-carlze[...] FC Carl Zeiss Jena 2009-11-10
[9] 서적 A Life Too Short Vintage Digital 2011
[10] 뉴스 Guivarc'h signs four-year deal at Auxerre 1999-06-04
[11] 웹사이트 Arsenal may bid for Benfica's Enke http://64.34.162.112[...] World Soccer News 2001-02-02
[12] 웹사이트 Atletico start Enke move in motion http://64.34.162.112[...] 2002-03-20
[13] 뉴스 Enke in Man Utd no-go http://news.bbc.co.u[...] BBC Sport 2001-12-06
[14] 뉴스 Barça swoop for Enke http://news.bbc.co.u[...] BBC Sport 2002-06-04
[15] 웹사이트 Interview mit Robert Enke http://www.hannover9[...] 2004-10-20
[16] 뉴스 Fans bay for blood over Barca's cup shame http://www.highbeam.[...] JPI Media 2013-02-16
[17] 웹사이트 Robert Enke ging in seiner Karriere schwere Wege https://www.derweste[...] Der Westen 2009-11-11
[18] 웹사이트 Robert Enke - Matches and Goals in Bundesliga https://www.rsssf.or[...] Rec.Sport.Soccer Statistics Foundation 2017-12-15
[19] 웹사이트 Goalkeeper Enke confirmed dead http://www.sportingl[...] 365 Media Group 2009-11-11
[20] 웹사이트 Robert Enke: Viel mehr als eine Nummer 1 http://www.sn-online[...] Madsack Media Group 2009-11-11
[21] 웹사이트 Robert Enke - International Appearances https://www.rsssf.or[...] RSSSF 2017-12-15
[22] 웹사이트 Police confirm Germany goalkeeper Robert Enke left suicide note https://www.theguard[...] 2017-03-20
[23] 뉴스 Germany cancel Chile friendly after Enke suicide http://uk.reuters.co[...] 2009-11-11
[24] 뉴스 Germany's Haunting Emptiness in Goal https://www.nytimes.[...] 2017-03-20
[25] 뉴스 Robert Enke: a career of peaks and troughs http://www.timesonli[...] 2009-11-12
[26] 웹사이트 Depression und Sport Robert Enke: Jugendjahre im Umbruch http://www.tagesspie[...] Der Tagesspiegel 2012-05-29
[27] 웹사이트 Two years old deaf girl died after Cochlear Implant operation http://fookembug.wor[...] Fookem and Bug 2014-01-22
[28] 웹사이트 Das Auf und Ab des Robert Enke https://www.derweste[...] Der Westen 2011-11-18
[29] 웹사이트 Er war bis zuletzt bei seiner kleinen Lara http://www.bild.de/B[...] Bild 2009-11-10
[30] 웹사이트 Erklärung zum Tod von Lara Enke http://www.mh-hannov[...] Medizinische Hochschule Hannover 2014-01-22
[31] 웹사이트 Germany goalkeeper Robert Enke dies at age 32 https://sports.yahoo[...] Yahoo Sports 2009-11-11
[32] 웹사이트 Robert Enke — a serene man in goal and life http://www.bundeslig[...] Deutsche Fußball Liga 2009-11-11
[33] 뉴스 Germany keeper dies in accident http://news.bbc.co.u[...] BBC News 2009-11-10
[34] 웹사이트 Enke death confirmed as suicide http://uk.eurosport.[...] Eurosport 2009-11-11
[35] 웹사이트 Robert Enke (24.08.1977 – 10.11.2009) http://www.kicker.de[...] kicker.de 2010-11-09
[36] 웹사이트 Teresa Enke: Letzte Hoffnung Liebe http://www.stern.de/[...] Stern.de 2009-11-11
[37] 웹사이트 Germany call off Chile friendly http://soccernet.esp[...] 2009-11-11
[38] 뉴스 Goalkeeper suicide stuns football http://news.bbc.co.u[...] BBC News 2009-11-11
[39] 뉴스 Goalkeeper suicide stuns football http://news.bbc.co.u[...] 2009-11-11
[40] 웹사이트 Ruhe in Frieden: Anrührender Abschied von Enke http://www.svz.de/na[...] Schweriner Volkszeitung 2010-05-18
[41] 웹사이트 "Er war einer von uns" – Trauerfeier mit vielen Emotionen http://www.abendblat[...] Hamburger Abendblatt 2011-04-01
[42] 뉴스 Hannover pay tribute to Robert Enke with special shirt http://news.bbc.co.u[...] 2009-11-25
[43] 웹사이트 Robert Enke: Remembering former Germany and Hannover goalkeeper, 10 years on https://www.bbc.co.u[...] 2019-11-12
[44] 뉴스 Der Enke-Effekt https://sz-magazin.s[...] 2010-02-18
[45] 논문 Celebrity suicide on the railway network: Can one case trigger international effects? https://www.scienced[...] 2024-05-12
[46] 뉴스 Schreiben über Depression und Suizid: Der Enke-Effekt https://www.tagesspi[...] 2024-02-28
[47] 간행물 Evaluating the Economic Benefits of Fertility Reduction 1969-03
[48] 웹사이트 Eloquent and sensitive story does justice to Robert Enke and his illness https://www.theguard[...] 2012-11-26
[49] 웹사이트 Ronaldo Reng's biography of German goalkeeper Robert Enke 'A Life Too Short' named Sports Book of the Year https://www.telegrap[...] 2012-11-26
[50] 웹사이트 Ligaverband beteiligt sich an Enke-Stiftung http://www.dfl.de/de[...] dfl.de 2011-04-01
[51] 웹사이트 Die Robert Enke Stiftung https://robert-enke-[...] 2019-11-12
[52] 웹사이트 Robert Enke http://www.playmaker[...] playmakerstats.com 2020-12-29
[53] 문서 Robert Enke
[54] 웹사이트 Nationaltorwart Robert Enke ist tot http://www.stern.de/[...] stern.de 2009-11-11
[55] 웹사이트 ハマン:「エンケの死を受け入れることはできない」 http://www.goal.com/[...] Goal.com 2009-11-11
[56] 웹사이트 Teresa Enke: Letzte Hoffnung Liebe http://www.stern.de/[...] Stern.de 2009-11-11
[57] 뉴스 エンケは自殺と判明 時事通信 2009-11-11
[58] 서적 footballista ソルメディア 2010-06-09
[59] 웹인용 독일 대표팀 GK 엔케, 열차에 치여 사망…자살로 추정 https://news.naver.c[...] 2009-11-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